[제주도민신문 = 오승택 기자] 정부가 서울 종묘 세계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국무총리까지 나서 인근 개발사업을 중단시킨 것과 달리, 제주 용천동굴 세계자연유산 보호구역 내 하수처리장 증설사업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시민단체들은 “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에도 지역과 유형에 따라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며 정부의 공식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월정리 용천동굴 세계유산 보호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황정현)는 17일 발표한 성명에서 “오영훈 제주도지사의 책임 아래 추진 중인 동부하수처리장 증설사업이 세계유산위원회 심의와 유산영향평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대한 사전 보고 없이 강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정부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한 종묘 인접 세운상가 고층건물 개발사업에 대해 세계유산 보호를 이유로 국무총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가유산청장, 국립중앙박물관장까지 전면에 나서 중단을 요구했다. 세계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종묘 주변 세계유산지구를 확대 지정하고, 인근 개발계획 전반에 국가 차원의 개입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제주 용천동굴 보호구역에서는 정반대의 행정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비대위의 주장이다. 비대위는 “세계자연유산 보호구역 한복판에서 분뇨·오폐수를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증설이 국제적 검증 절차 없이 추진되는 것은 세계유산 보호 의무를 사실상 외면한 중대한 행정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특히 “세계유산의 가치는 문화유산이냐 자연유산이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정권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며 “종묘 앞에서 작동한 국가의 책임이 왜 제주 용천동굴 앞에서는 사라졌는지 정부는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제주 세계자연유산 보호의 1차적 책임자로서 관리·감독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번 사안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비대책위원회는 정부에 대해 △제주 용천동굴 세계유산 보호구역 내 동부하수처리장 증설사업의 즉각적인 전면 재검토 △세계유산위원회 심의 및 유산영향평가 등 국제 기준 적용 여부에 대한 명확한 공개 △심의 및 유네스코 사전 보고 절차가 생략된 경위에 대한 공식 설명 △세계유산 보호 기준의 지역별 차별 적용 여부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비대위는 “세계유산 보호는 선언이 아니라 국제사회와 국민에 대한 책임”이라며 “정부는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성명에는 ‘월정리 용천동굴과 동부하수처리장 문제 비상대책위원회’, ‘세계유산 용천동굴을 지키는 사람들’, ‘월정을 사랑하는 사람들’ 등 지역 시민·환경단체들이 연대 단체로 참여했다.